빛나는 그곳에

마음에 여백이 필요할 때
사유의 시간 속을 걷는다 사유원

만물이 소생하는 봄.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녹으며 새싹이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는 여전히 묵은해의 근심과 생각을 비우지 못한 채 봄을 맞이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라는 말처럼, 잘 비워야만 좋은 생각으로 다시 채울 수 있다. 비움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자연을 벗 삼아 목적 없이 걷는 것이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찾고 싶다면, 대구 군위군에 자리한 사유원으로 떠나보자.

ⓒ김종오 사진작가

모과나무와의 인연

70만㎡의 넓은 부지에 조성된 사유원은 대충 돌아봐도 3~4시간이 소요된다. 머무는 동안 느려진 걸음 탓에 하루가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유원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하루에 정해진 인원만 입장 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다. 자신만의 속도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어린 시절, 식탁에 놓아둔 모과는 그윽한 향기로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차에는 방향제 대신 모과 열매를 놓았다. 요즘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추억의 모과나무를 사유원에서 만날 수 있다. 산 중턱에 자리한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이라고 불리는 정원은 사유원의 탄생을 알리는 곳이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온 108그루의 모과나무에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샀는지를 기록한 이름표가 붙어있다. 태창철강 유재성 회장은 오래된 모과나무가 일본으로 반출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단번에 달려갔다. 이때 웃돈을 주고 산 모과나무 4그루와의 인연은 사유원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모과나무를 팔기 위해 유 회장을 찾아왔다고 한다. 많아진 수목을 옮겨심기 위한 넓은 부지가 필요해졌고, 지금의 자리가 낙점되었다.

사유원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사람과 자동차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사유의 공간

입구에서 나눠주는 생수 한 병을 챙겨 사유의 공간에 들어섰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 회색빛 콘크리트 건축과 마주한다. ‘자유롭게 거니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소요헌(逍遙軒)’.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작품이다. 그는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국내에는 파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안양 파빌리온, 아모레퍼시픽 용인연구소가 그의 손길을 거쳤다.
소요헌은 서양 건축가의 시선에서 동양 철학을 담은 명상 공간이다. 자연과 장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축가의 철학이 곳곳에 녹아있다. 기하학적인 노출 콘크리트 건축에 자연의 빛을 끌어들였다. 시선이 만나는 곳에는 실록 가득한 중정을 두었다. 안쪽 공간에는 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붉은색 철제 조형물이 걸려 있다. 긴장감이 감도는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한 줄기의 빛은 희망을 말하는 듯하다.
사유원에는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이 즐비하지만 정작 이곳의 주인공은 자연이다. 대부분 건축물은 땅속에 묻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소대(巢臺)만큼은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소요헌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는 건축가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새 둥지’라는 의미를 지닌 소대는 팔공산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내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사방으로 열린 창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매 순간 감상할 수 있다. 마침내 올라선 정상에서는 팔공산 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작고 고요한 예배당 ‘내심낙원’도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작품이다.

자연과 건축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진 숲

사유원 건축은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방문객의 발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이따금 만나게 되는 건축은 쉼터 역할을 한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고 대화를 걸어오는 것 같다. 사유원 설립자와 인연이 깊은 승효상 건축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첫 번째로 지어진 현암(玄巖)도 그의 작품으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 장대한 자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물의 정원에 우뚝 서 있는 ‘조사(鳥寺)’는 새를 위한 공간이다. 훗날 무너져도 보수하지 않을 예정이란다. 건축자재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목재를 사용했다. 건축가의 의도를 알아차린 새들이 모여들어 둥지를 틀며 아름다운 소리를 선물했다.
명정(暝庭)은 있는 듯 없는 듯하여 그냥 지나치기 쉽다. 주변은 탁 트여 있어 누가 봐도 전망대를 세우기 좋은 자리처럼 보인다. 승효상 건축가의 선택은 전망대가 아닌 자연 지형에 순응한 명상 공간이었다. 좁고 긴 계단을 따라 내려가도록 설계되어, 마치 고분이나 왕릉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긴 진입로를 돌고 돌아 마주한 장면은 물에 반영된 하늘과 빛뿐이다. 명정은 사유원에서 느낀 감정을 마음에 담아가기를 바라는 건축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눈을 감고 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명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건축가는 내심 이 자리에 짓지 못한 전망대가 아쉬웠는지, 더 높은 곳에 있는 물탱크에 외벽을 둘러 ‘첨단’이라는 전망대를 만들었다.
발걸음이 무뎌질 즈음, 앉아서 쉴 수 있는 전통 정원 ‘유원(瀏園)’이 나타난다. 설립자가 평생 수집한 돌과 소나무를 모아 조성한 정원이다. 유재성 회장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사야정’ 마루에 앉아 눈을 감아본다. 아직은 찬 기운이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함께 실려 온 진한 솔향기는 머리를 맑게 한다. 작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모아 만든 연못 덕분에 청량한 소리까지 들리는 완벽한 쉼터다.
아침부터 꼬박 걸어온 사유원의 마지막 여정은 누워있는 수도원 ‘와사(瓦寺)’에서 끝난다. 3개의 연못 위에 긴 철제 구조물이 놓여 있는 형태다.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와사는 비를 맞으며 자연스럽게 녹슬어 간다. 사유원 건축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에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철제 프레임과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자연을 감상하며 유유히 떠 있는 구름에 근심을 흘려보낸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비로소 비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사유원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하는 ‘한국관광 100선’에 올해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유원은 진정한 휴식과 비움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이곳에서 일상의 무게를 내려두고 마음에 여백을 만들어 보자.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에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철제 프레임과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자연을 감상하며 유유히 떠 있는 구름에 근심을 흘려보낸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비로소 비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사유원

주소

대구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76

시간

09:00~17:00 (15시 입장마감)

휴무

매주 월요일 정기 휴무

입장료

대인 평일 50,000원 주말 69,000원 /
학생 평일 45,000원 주말 6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