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갈라진 틈을 타 서격거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달력의 흐릿한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조바심을 내고 있을 얼굴이 선했다. 성태는 어깨와 귀 사이에 스마트폰을 끼워 넣은 채 물이 뚝뚝 떨어지는 행주로 식탁을 닦았다. 새집의 인조 대리석 상판은 차갑고 단단했다.
성태는 전화를 끊었다. 액정에 묻은 뺨의 유분을 소매로 문질러 닦고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오후 다섯 시의 태양이 베란다 창을 통해 길고 왜곡된 사각형의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평당 가격이 주변 시세보다 30퍼센트는 저렴하게 나온 아파트였다. 등기부등본은 깨끗했고, 전 주인이 해외 이민을 이유로 집을 급하게 내놓았다고 했다. 미신을 따지느라 이 좋은 매물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는
가장 큰 손해였다. 성태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첫 번째 소리가 들린 것은 그날 밤, 정확히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거실 동쪽 벽면이었다. 새로 도배한 실크 벽지 뒤편에서 거친 수수빗자루로 시멘트를 쓸어내리는 듯한 마찰음이 일었다. 성태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이 어둠 속에서 동쪽 벽면의 어렴풋한 윤곽에 머물렀다. 쥐의
소행이라기엔 폭이 넓고, 층간소음이라기엔 박자가 지나치게 일정했다. 건물이 밤기온에 수축하며 내는 소리일 뿐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
소리는 매일 밤 자정을 기해 자리를 옮겼다. 남쪽 베란다 창틀에 가라앉은 기묘한 흙먼지 띠, 서쪽 장롱 뒷벽을 따라 무언가 둔중한 가죽을 끄는 듯한 서걱거림. 성태는 이삿날 아침 보았던 스마트폰의 달력을 떠올렸다.
그날은 음력 1일이었다. 민속학적으로 ‘손’이라 불리는 존재가 동쪽에 머무는 날. 다음 날은 남쪽, 그다음은 서쪽. 정확히 시계방향이었다.
성태는 낮게 중얼거렸다. 입안이 바짝 말라붙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시니컬하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음력 7일이 되던 밤, 소리는 마침내 북쪽 현관문 바깥에 도달했다.
무언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무게를 가진 존재가 현관문 손잡이를 쥔 채, 지긋이 문을 안쪽으로 밀어붙이는 압박감에 가까웠다. 철제 문틀이 미세하게 비틀리며 끼이익 소리를 냈다. 성태는 현관 인터폰의
화면을 켰다. 적외선 카메라에 비친 복도는 흑백의 고요 속에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문틀 하단의 틈새로 정체 모를 차가운 바람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와 그의 발목을 적셨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음력 9일과 10일이었다. 손이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는 어떤 방향에도 귀신이 없다는 그 ‘손 없는 날’이었다. 성태는 달력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그 가상의 규칙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거슬렸지만,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모레가 되면 이 기괴한 소음도 멈출 것이었다.
마침내 음력 9일의 밤이 찾아왔다. 집 안은 기묘할 정도로 적막했다. 벽을 긁는 소리도, 문을 밀어붙이는 압박도 없었다. 성태는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45분이었다. 15분만 지나면 완전히 안전한 영역으로 진입하는 셈이었다.
식탁이, 소파가, 안방의 침대가 일제히 몇 밀리미터씩 바닥을 쓸며 움직였다. 소음은 사방에서 동시에 중심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갔어야 할 존재들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집은 ‘손 없는 날’이 아닌 날에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이삿짐들과 성태의 육신으로 인해 이미 거대한 덫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갈 곳을 잃은 그것들이 집
안의 공기를 압착하듯 성태를 향해 밀려들었다.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가구들은 멈춰 있었고, 벽지도 잠잠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방으로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성태는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천장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천장의 백색 실크 벽지 위로, 거대한 사람의 형상을 한 음영이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방 안의 공기와 음기, 그리고 이 집에 고여있던 모든 기운이 뭉쳐져 만들어진 짙은
얼룩이었다.
그 얼룩의 중심이 서서히 아래로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천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혹은 그 얼룩 자체가 성태의 얼굴을 향해 기어 내려오는 것처럼. 성태는 소리를 내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