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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PR 2019 Vol.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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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writer. 박정은 (도서 〈공간의 온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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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아버지의 을지로
을지로에는 수많은 공구상가가 모여 있다. 어째서 그 많은 가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의외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을지로에 미군부대가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미군부대에서 군수물자가 흘러나오면서 그 부근에 공구상들이 몰리게 된 것이다. 점차 주변으로 미싱, 조명, 타일, 가구, 인쇄소 등이 생겨나면서 거대한 상권이 형성되었다. 몇 년간 품었던 미스터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침이면 공구며 철물, 목재, 부품들이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고 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을지로를 찾는다. 좋은 물건을 비교해보고 싸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수년간 쌓여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기계를 만지며 살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일을 즐거워하신다. 농대를 나온 아버지가 어째서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얼마 전까지도 잘 몰랐다. 아버지는 을지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작은 점포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고, 각종 공구며 철물, 부품들이 가득했다. 그는 복잡한 골목을 뛰놀며 그 환경에 알게 모르게 익숙해졌을 것이다. 20대 후반 회사에 취직한 후, 큰 공장에 갔는데 기계들이 압도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한 아버지는 ‘앞으로 나는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결심은 어릴 때부터 보고 느낀 경험의 영향을 받아서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을지로와 공장을 자주 다닌 덕분인지 딸인 나 역시도 그 풍경과 사람들을 가깝게 느낀다.
현재, 서울에 하나뿐인 특별한 공간
나는 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을지로에 자주 갔다. 중학교 때 미술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입체적인 그림이라 케이스를 아크릴로 주문 제작을 해야 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을지로에 가면 다 만들어 준다’였다. 친구들과 함께 무작정 찾아가 여러 가게를 돌며 가격을 흥정했고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역시 을지로였다. 나에게는 인쇄소 골목도 중요했다. 다양한 인쇄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견적을 비교해보기도 쉽고, 필요할 때는 원하는 공법으로 제작이 가능한 가게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하루 날 잡고 을지로를 돌아다니면 필요한 일을 맡기고 원하는 재료나 부자재까지 살 수 있었다. 다양한 가게들이 조금만 걸으면 되는 거리에 모여 있어 일을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것이 을지로가 가진 경쟁력이었다.

건물과 시설이 오래돼서인지 비교적 임대료가 싸고, 시와 구에서 예술가, 스타트업들을 지원해주면서 청년들이 을지로로 모이기 시작했다. 을지로에 젊은 창작자들이 모이니 변화가 생겼다. 독특한 작은 가게들과 작업실, 갤러리들이 오래된 건물 구석구석 생겨나며 재미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근처에서 일하는 중년의 노동자가 갤러리 입구에 붙은 포스터 그림을 보며 무슨 전시를 하냐며 묻기도 하는 곳. 골뱅이나 노가리를 파는 오래된 노포와 감각적인 카페가 공존하는 곳.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어우러지는 곳. 서울에 하나뿐인 특별한 공간이라 생각한다.
미래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만드는 것
그런 을지로가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영화 〈집의 시간들〉에서는 30년 정도 살아온 자신의 오랜 집을 ‘가족’과 같다고 말한다. 아파트가 재개발이 되면 시설의 편리함은 있을지언정, 기존의 단지처럼 나무가 우거지고 살기 좋았던 환경은 다시 만들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을지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함께 수년간 쌓아놓은 상권과 인지도, 노하우, 네트워크는 물론 시간이 계속 덧대어지며 만들어진 지역의 독특한 분위기도 재현이 불가능하다. 과거의 피맛골과 새로 만들어진 건물의 먹자골목이 같지 않은 것처럼, 오래된 카메라 골목의 아우라를 세운스퀘어에는 가져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가치를 지키며 현재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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