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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PR 2019 Vol.88

MAR+APR 2019 Vol.88 ▶ 테마속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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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공간에서 예술의 불꽃을 피우다
writer.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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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예술가가 사랑한 집〉, 이케가미 히데히로 지음, 페이퍼스토리 펴냄
수많은 예술가들이 탄생시킨 작품에는 그것을 제작한 아틀리에와 집이 있고 공간과 풍경이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그 공간은 다락방이었고,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손수 가꾼 정원이었다. 예술가들의 위대한 작품과, 작업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 살았다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거대한 팔레트가 되어준 모네의 정원
빛의 화가라 불리는 클로드 모네. 말년의 대작 〈수련〉은 ‘끝없는 화면’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시도한 작품이다. 60세를 눈앞에 두고 시작된 도전이었으나 그 꺼지지 않는 창작 의욕으로 타원형의 벽면을 빙 둘러, 정말 모든 것이 이어진 화면을 완성했다. 모네의 정원은 센강과 엡트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있다. 그가 지베르니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것은 1883년으로, 모네가 마흔 세 살의 일이다. 이곳에서 지내던 모네는 53세가 되었을 때 직접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약 1만 평방미터나 되는 광대한 정원은 금련화와 장미, 벚꽃과 사과나무가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모네는 창작 이외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정원 가꾸는 일로 보냈다.

모네의 정원을 보면 그의 꼼꼼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연못은 애써 엡트강에서 물을 끌어왔고 백 가지가 넘는 꽃들도 개화 시기와 색을 고려해 심었다. 저택은 주위와의 조화를 생각해 외관을 간소하게 꾸몄는데 아르누보와 같은 당시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내부의 색도 방마다 조화롭다. 가령 식당의 벽면은 옅은 노란색이고 문은 보라색, 그리고 식기까지 직접 디자인한 청색으로 통일했다. 말년에는 백내장을 앓았으며 아내와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원을 돌보는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여러 권의 원예 잡지를 읽고 공부하면서 정성 들여 정원을 가꾸었다. 그에게 이 정원은 거대한 팔레트였던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70일, 고흐의 다락방
파리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 이곳에는 ‘라부(Ravoux)’라는 이름의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의 다락방에서 고흐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마지막 70일을 보냈다. 오베르에서 머물던 10주간 그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그가 그린 교회나 목장이 그대로 남아 있고, 교외에는 고흐가 여러 차례 그렸던 보리밭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펼쳐져 있다.

고흐가 이 마을로 와서 처음 살았던 곳은 인상파 화가들의 후원자로 알려진 정신과 의사 가셰 박사의 소개로 살게 된 다른 장소였다. 그러나 방세가 너무 비쌌던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라부 여관 3층으로 이사를 한다. 지금도 여관 지붕에 있는 작은 창은 그가 살았던 다락방의 창문이다. 고흐가 머물렀던 다락방은 무척 간소하고 삭막했다. 당시 방은 하룻밤에 3.5프랑이었다고 한다. 요즘 화폐 가치로 치면 약 2만원 정도의 요금이다. 여기에 간단한 아침식사를 포함해 2만5천원에 장기투숙을 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라부여관 1층은 현재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고흐가 살았던 때에도 그곳은 식당을 겸한 술집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당시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고흐는 밤에도 거의 이곳에서 만 원 정도의 식사를 했을 것이다. 고흐는 이곳에서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고흐의 마지막 예술혼이 담겨있는 오베르에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건물이나 거리를 찾아보는 것도 마을을 걷는 즐거움의 하나다.
병마도 꺾지 못한 예술에 대한 찬미, 르누아르의 꼴레뜨 저택
인상파의 거장이라 불리는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가 사랑하는 아내 알린과 남프랑스 카뉴의 꼴레뜨 저택을 사들인 것은 66세 때의 일이다. 꼴레뜨 저택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곳이다.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구매할 정도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지만 류머티즘으로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르누아르가 살았던 이 저택을 둘러본다면 왜 그가 이곳을 마지막 장소를 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택지에는 그가 사랑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울창한 나무들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햇살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르누아르는 그림의 소재로 삼을 정도로 꼴레뜨 저택을 좋아했다. 원래 올리브밭이었던 정원은 올리브 외에 아내 알린이 좋아하는 오렌지나무도 많다. 그녀는 정원 가득 꽃을 키웠고 그 꽃을 꺾어 집안을 장식했다. 그것을 보면 르누아르는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르누아르는 이곳에서 말년에 시작한 조각에 사력을 다해 도전했고 두 명의 조수를 두어 제작에도 힘썼다. 실제로 붓을 들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팔에 붓을 묶어서까지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아들의 회고록이나 다른 많은 책에서 말하는 그런 비장함보다는 항상 밝고 즐거운 분위기가 넘쳐났다고 한다.
일생 단 한 명의 여인의 마지막 숨결을 품은 달리의 별장
하얀 마을과 투명한 지중해를 품고 있는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휴양지 카다케스는 스페인이 낳은 천재 화가 달리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별장이 있던 이곳에 자주 들렀던 달리는 훗날 평생을 함께한 갈라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달리 인생의 유일한 여인, 갈라의 마지막을 지켜보기까지 한 달리는 이 집에서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했다.

‘달걀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달리의 집은 카다케스 포트리가트에 있다. 달리가 낡은 어부의 집을 네 채나 구입해 40년에 걸쳐 개축한 이 집은 그 자체가 초현실주의자인 달리의 거대한 작품이다. 집은 구석구석 달리가 좋아하는 소재로 꾸며져 있는데 초대형 달걀 오브제가 얹혀 있는 외관은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대변한다. 이 집에서 달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것은, 지중해의 경치를 액자처럼 보여주는 작은 창이다. 예술가의 일상을 가늠할 수 있는 디자인의 하나이다. 바다를 향해 가로로 길게 나 있는 1층의 작은 창을 통해 달리는 매일 해변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포트리가트는 달리의 작품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이곳에는 바닷바람에 깎여나간 기암이 즐비한데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이 풍경은 ‘더블 이미지’라는 표현 기법을 탄생시켰다. 각도를 달리하면 숨겨져 있던 다른 모티프가 모습을 드러내는 트릭 표현기법인데, 유명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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