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라피 김준기
마음과 마음
신경정신과 원장

트라우마 이후의 주변환경
한공주 2013

영화 한공주는 밀양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한공주’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어려서 가정에서 공주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소중한 존재’였다는 점을 모든 이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주인공 한공주는 이 세상 그누구에게도 전혀 공주 취급을 받지 못한다. 그토록 끔찍한 사건을 당하고 연약하게 떨고 있는 어린 소녀일 뿐인데, 주변의 그 어떤 어른도 이 불쌍한 한공주를 이해해주거나 안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영화를 정밀 검토해 보았지만, 정말 단 한 사람도 한공주에게 진짜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보살피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한 어른들

“이런 일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혀져”라는 그 흔해 빠진 충고를 무심하게 던지는 담임 선생님, “혹시 어린 것이 임신한 것 아니냐?”며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는 담임의 어머니, “네가 온 동네를 창피하게 만들었잖아”라며 험하게 구박하는 경찰관들, 학교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나는 것만을 걱정하며 한공주가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지내기만을 종용하는 교장선생님, 그리고 그 근엄하신 교장의 뒤에 마치 병풍처럼 서서 “좋게 말할 때, 어서 말 들어”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다른 선생님들, 한공주가 전학을 간 학교까지 쫓아와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도 없이 오히려 “네가 먼저 꼬리 친 거 아니야? 어서 합의서에 도장이나 찍어”라며 겁박을 하는 가해자의 부모님들, 3년 만에 찾아온 딸에게 “아버지가 찾아가라고 했냐? 지금은 장사가 안 되는 때이니 나중에 오라”고 차갑게 말하며 돌아서는 친어머니, 그리고 가급적 빨리 가해자들의 부모님과 합의하여 돈이나 받아내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친아버지 등 영화 속에 나오는 어른들은 누구 하나 한공주의 상처받은 마음을 이해하려하지도, 끌어안으려하지도 않는다. 그 어른들 모두 이제 겨우 17살밖에 되지 않은 한공주보다 적어도 2배, 3배, 4배는 더 인생을 오래 살았을 텐데. 어느 누구도 끔찍한 트라우마 사건을 겪고 난 후에 떨고 있는 어린 아이의 아픔을 토닥여주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어른들은 단지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다. 전학하여 갈 곳이 없는 한공주를 자신의 어머니 집에서 지내게 해주는 책임감 있는 담임 선생님, 한공주를 의심하고 박대하면서도 자신의 집에 잠자리를 내주는 담임의 어머니, 한공주가 신속히 전학을 갈 수 있게 조치를 취해 주는 교장선생님, 한 시라도 빨리 사건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경찰관들, 한공주에게 그나마 용돈 한 푼이라도 쥐어주려는 친어머니, 맛난 음식이라도 먹이려고 비싼 안주를 주문하는 친아버지 모두 다 나름 성인으로서 일정 부분의 자기 역할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듣기에도 민망한 뻔한 조언을 해주고, 차분히 섬세하게 다루어가야 할 문제를 성급하고 거칠게 해결하려 한다. 마음껏 울 수 있는 엄마의 품이 그리워 찾아온 아이에게 돈 몇 푼 쥐어 주면서 외면하고, 합의서를 내밀고 이제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는 그저 그런 루틴(routine)한, 계산 빠른 얍삽한 가짜 어른의 역할 말고, 진짜 어른다운 어른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끔찍한 상처를 입은 어린 아이를 진심으로 보살펴 안심시키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을 영화 속에서는 정말 한 사람의 어른도 모르고 있다.

 

상처받는 사람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정형화된 폭력적인 사회현상들

그런데 이러한 가슴 답답한 일은 비단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놀라울 만큼 똑같이, 마치 판박이처럼, 매우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어린 여학생의 성폭력 사건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초등학교에서의 왕따, 중고등학교에서의 이지메, 군대에서의 가혹 행위, 직장에서의 괴롭힘 등의 사고가 일어난 이후에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피해자의 주변 환경에서 아주 정형화된 방식으로 빈번히 일어나는 폭력적인 현상이다. 정말 자기 딸이나 아들이 저런 위기 상황에 빠져 있을 때에도 저렇게 파렴치하고 뻔뻔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비난과 멸시는 말할 것도 없고, 방관과 무관심조차도, 심지어는 평상시의 규칙만을 염불하듯 외우는 완고함조차도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에게는 2차, 3차의 트라우마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이전에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인가?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하다못해 어떻게 하면 절대로 안 되는지. 어디에서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대개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주변의 무신경한 어른들보다 목소리가 작고 힘이 없다. 가끔 미숙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난 억울하다” “지금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다” “나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아이들은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그렇게 발악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자신에게 오는 비난과 거절의 눈빛이 더 강렬해진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체득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칫 잘못 했다가는 더 버림받고 완전히 소외당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은 대개 ‘침묵’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더 많이 반성하고 자책하고, 마치 자신이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인 것처럼 도망 다니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이 침묵할수록, 우울해할수록, 현실에서 도망칠수록, 어른들의 몰이해와 무심함은 아이들을 더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다. 아이가 위축 되어 가만히 있으면, “이제 다 끝난 일이니 빨리 그 일을 털어내고 정상적인 착한 아이가 되라”고 무언의 압력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력은 휘청거리며 겨우 버티고 서있는 아이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주는 데미지를 주는 꼴이 된다.

 

위로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곧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면역강화제

같은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했어도,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양상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또 어떤 사람은 괜찮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상태가 악화되는 양상을 반복한다. 트라우마로 인한 후유증의 경과에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트라우마가 일어나고 난 뒤의 피해자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피해자의 주변에 위로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트라우마의 후유증은 줄어들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은 강화가 된다. 믿을만한 친구나 연인, 의지할 수 있는 배우자나 부모, 형제, 학교 선생님의 존재는 트라우마 후유증을 감소시켜주는 효능이 매우 좋은 면역강화제와도 같다. 반면 갈등이 많은 주변 환경의 몰이해와 무관심은 트라우마에 대한 면역력을 급격히 악화시키는 악성 바이러스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직 자아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소아청소년의 경우는 가족, 학교, 친구의 영향을 상상 이상으로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소아청소년들에게는 주변의 어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제 세상의 인식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범죄 피해자 상담센터, 성폭력 상담센터, 학교폭력 상담센터, 가정폭력 상담센터 등 피해자들의 마음을 보살피려는 공공기관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한공주와 같은 경험을 하는 아이들이, 청소년들이, 사회적 약자들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 상담센터보다 더 많은 진짜 어른들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PS.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지만 난 말할 수 없이 슬프다. 친구들이 보내는 응원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공주가 다시 시작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가 생겨나는 것이 오히려 더 허망하게 느껴져 가슴이 아프다. 공주는 언젠가 자신이 강물에 뛰어들 날이 올 것을 예측하고 필사적으로 수영을 배웠다. 죽으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에도 사실은 “나 온전히 살고 싶어” 하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 우리 모두 더 귀 기울어야만 했다. 더 가까이 손 내밀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