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ist와 함께하는 여행
글_강석훈
국립무형유산원
학예연구사
사진_박민구
0100 STUDIO 대표
군산시청
결코 지나칠 수 없는일제의 그림자를 밟다
군산만큼 일제(日帝)에 대해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도시가 있을까?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가장 ‘애지중지’했던 항구도시 군산.
아직도 그들의 남긴 욕망의 자국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 수탈의 최전선에 있었던 이 기지에는 ‘맛집 군산’이라는
매스컴의 병풍에 가려져 미처 제대로 살피지 못한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이곳을 찾는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은 아픔과 극복의 역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그것을 전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조선침탈의 시작, 구 군산세관 본관(사적 제545호)
나가사키 18은행의 모습
조선은행 군산지점
일제의 ‘군산 만들기’ 프로젝트의 시작은 구 군산세관에서부터 시작 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의 거대한 스케일에 눌려 상대적으로 잘 보이 지는 않지만 맞은 편에 자리한 빨간 벽돌의 고풍스러운 지붕을 갖춘 아 담한건축물이 바로 구 군산세관이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침탈당하기 직전인 군산만큼 일제(日帝)에 대해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도시가 있을까? 일제가 조선을 강점1908년, 일제에 등 떠밀려 나랏돈 8만 6천 원의 거금이 투입되었다. 지붕에는 물고기 비늘 모양의 슬레이트를 촘촘히 박아 넣어 윤이 반질반질하다.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첨탑이 세워져 있고 반원 형태의 로마 나가사키 18은행의 모습 네스크 양식의 창문과 출입문이며 현관 지붕을 밖으로 내어두고 해가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벽면 전체를 창문으로 둘러친 모양새가 매우 이국적이다. 이것은 대한제국 말 당시 일제가 받아들인 이른바 ‘혼합식 유럽 스타일’이다.
일제가 군산세관 세우기에 제일 먼저 공을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최적의 조선 수탈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역 통제권이 필요했기 때문이 다. 군산은 전북, 충남 일대의 광활한 곡창지대의 쌀을 값싼 가격에 끌어오기에 더없이 좋은 지리적 조건을 지녔다. 또한, 군산 앞바다에서 부터 금강 상류에 이르는 막대한 상권 거점을 차지하여 일제의 공산 품을헐값에 대량으로 판매하는 일제의 무역 항로를 개설하는 한편, 청 나라 와 강경 상인과의 무역을 차단할 수 있다는 그들만의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군산에 공식적인 통제기관인 세관을 짓는 것이 조선 강점의 최우선 과제였다.
일제최고의번화가,군산내항거리
바다가 훤히 보이는 군산내항 끝자락에 오래된 철골 다리 여러 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우리말로 뜬다리, 한자로는 부잔교(浮棧橋/등록문화재 제719-1호)라고 한다. 1920~1930년대에 지어진 산업 시설물이다. 일제가 조선을 넘어 아시아 정복의 야심을 펼칠 당시, 호남 일대의 수백만 톤의 쌀이 열도로 빠져나갔다. 한때 이곳을 통해 조선반도 곡류 유출량의 약 4분의 1이 빠져나갔을 정도라 하니 실로 대단한 수탈 기계 노릇을 한 셈이다.
구조를 보면 물에 쉽게 뜨도록 상자 모양의 부체를 띄워두고 그 위에 철근, 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덮어 다리로서의 유연성과 안정성을 갖추었다. 썰물, 밀물의 수위를 가늠하여 좌우의 쇠사슬이 아래위로 움직일 수 있어 언제든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다. 하나의 다리에 3천 톤급의 배 4척이 동시에 달라붙어 작업할 수 있는 당시로써는 매우 획기적인 시설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소형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부둣가에는 일제 번영의 옛 흔적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제374호)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제372호)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군산 철도선의 마지막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옛 은행 옆으로는 항구로 곧장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간다. 이곳은 한때 일제의 관공서, 금융기관, 민간회사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군산 최고의 번화가였다.
일제대부호의옛집,‘히로스가옥’
(군산신흥동일본식가옥/등록문화재제183호)
군산 내항 거리에서 주택가로 조금만 들어오면 일제식 가옥들이 군데군데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군산이 일제의 수탈 도시로 전락하면서 군산 항구 중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자본력을 잃어버린 조선인들은 점차 항구의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고 군산항의 금싸라기 땅에는 부유한 일본인 농공 상인들이 들어와 고급 주택을 짓고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했다. 사실상 일본인 전용 거주촌과 다름없었다.
이때 포목상으로 군산 일대에서 ‘끗발’ 세우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히로스 요시사부로(廣津吉三郞)이다. 농장 대지주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군산에서 보기 드물게 상업으로 부를 이룬 자로, 당시 군산부 협의회 의원을 지낼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미곡 취인소의 이사도 역임했다. 미곡 취인소란 현물 없이 쌀을 사고파는 요즘으로 따지면 증권거래소와 같은 곳이다. 그는 단순한 상인이 아닌 군산 경제의 주요 인물이었다.
신흥동 길로 접어들면 곧 붉은빛의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1925년에 지어졌으니 이제 6년 후면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된다. 전체 대지 375평에 건물 평수가 110평에 달하니 당시 집주인의 권세가 실로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담장을 따라가면 ‘ㄷ’ 형태로 움푹 파인 곳에 작은 출입문이 나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어 집 안과 담장 사이의 정원이 자연스레 외부와 차단된다.
이러한 폐쇄적 구조는 집 안까지 연결된다. 일자 형태의 좁은 복도가 양 갈래로 곧게 뻗어 있고, 그 옆으로는 수많은 방이 연결되어 있다.
2층 건물로 1층만 해도 방이 7개, 2층에도 방이 2개가 있다. 집 전체가 오밀조밀한 방들로 꽉 차 있으니 답답한 미로 속에 갇힌 느낌마저 든다. 이 집을 일컬어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 주택 야시키(屋敷)라고 부른다. 접객실에 이르면 족자, 화병, 인형, 고급 다기 등이 진열되고 있고 그 앞에는 갖가지 꽃나무와 자연석으로 어우러진 일본식 정원이 펼쳐져 있다. 정원의 끝자락에는 시멘트로 된 2층 창고가 본채 뒤에 슬며시 가려져 있다. 이 창고가 바로 히로스의 옛 금고이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군산 일대의 지주들치고 이런 금고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금고에는 조선에서 수탈한 수많은 문화재와 귀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수많은 조선의 물건들이 군산 앞바다의 부잔교를 건너 열도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그것 중 대다수는 행방도 모르는 채 열도의 어딘가에 고요히 묵혀 있다.
히로스가옥의 내부
일본의사과를받고싶다면이곳으로,
동국사(등록문화재제64호)
동국사

1909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 붓칸(內田佛師)은 일제의 조선 강점이 완성기에 접어들게 되자 열도를 건너와 군산에 ‘금강사(錦江寺)’라는 이름의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 사찰을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 조동종은 조선에 160여 개의 사찰과 포교소를 운영한 대규모의 종단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의 소속 종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 불교는 식민지 통치의 중요한 기구 중 하나로 기능했다. 금강사의 2대 주지인 나가오타 겐테이(長岡玄鼎)가 쓴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들은 함께 일반 병합을 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평화의 아름다운 시대에 이르렀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는 바이다. (중략) 천황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락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같이 굳세게 될 것이다.”
일본 불교의 조선 포교 활동은 식민 통치를 위한 정신적 통제 활동이었다. 사찰 입구의 양편에 세워진 돌기둥에 새겨진 일왕 연호와 사찰 이름에서부터 그들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이곳 사찰에는 단청이 없다. 처마에도 어떤 장식이나 색이 없다. 흰 벽과 검은색 지붕의 단순한 구조에서부터 급격한 경사의 사찰 지붕과 건물 뒤편에 심어둔 대나무 숲, 종각 주변에 늘어선 일본 특유의 신(神)들을 마주하자면 마치 일본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해방을 맞이하고 10년이 지난 후, 금강사는 우리 불교 종단에 의해 간판을 내리고, ‘해동성국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를 지닌 동국사(東國寺)로 거듭나게 된다. 금강사 대웅전 뒤에는 여전히 일제 잔재인 일본인 장병 유골 안치실이 있었다. 이 안치실은 1960년에 해체되고 당시 납골당의 유골들은 모두 금강 일대에 뿌려졌다. 이 사실은 일본 언론에도 알려져 열도에도 작지 않은 파장을 주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극에 달한 시대였다.
동국사 참사문비와 종탑
부처님이 바라보고 있을 창의 모습
이로부터 50년 후인 2010년 일본 조동종은 전격적인 조선인에 대한 참회를 결정하면서 방문단을 인솔해 와 이 곳 사찰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그들은 일제의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의미를 담아 동국사 내에 참사문비를 제막했다.
“우리는 과거 해외 포교의 역사 속에서 범했던 중대한 과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아시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
하고자한다. 그러나 이는 과거 해외 포교에 종사했던 사람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일본의 해외 침략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것을 정당화했던 종문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사찰이 건립으로부터 110년이 지난 오늘날, 동국사에는 침탈, 전쟁, 이데올로기의 역사 위에 이제 반성, 참회, 협력의 역사가 새로이 쓰이고 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그들의 진솔한 사과를 받고자 한다면 이곳에 들러 보기를 추천한다.
스페셜리스트 소개

군산 여행가 강석훈 씨는 중앙대에서 민속학을 전공했다. 15여 년간 전국 각지의 농촌, 어촌, 산촌, 도심을 돌며 지나간 옛이야기와 현재 주민들의 일상에 담긴 소소한 사연들을 수집, 채록하였다. 현재 서울과 대전에 관한 생활 에세이를 집필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왜 우리는 군산에 가는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