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ature 글, 사진_김용규
여우숲 숲학교 교장

산국,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

나의 코는 그윽한 향기에 빠져든다. 귀는 저절로 열려 그 꽃이 매개하는 소리를 듣는다. 붕붕 대고 윙윙대는 날벌레들의 날갯짓 소리. 눈동자 역시 바쁘다. 빠른 춤을 추듯 허공과 꽃 사이를 바삐 오가는 벌이며 부전나비며 파리류들이 그리는 곡선을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는 사이 쓸쓸함은 지워지고 가슴으로는 위로가 차오른다.

대지의 열기가 사라지고 초목이 잠들 때
빛깔로만 치자면 가을은 봄보다 찬란하다. 단풍의 장관을 말함이다. 봄은 꽃핀 자리를 통해 그저 부분을 밝히지만, 가을은 가릴 곳 없이 온숲을 물들인다. 가을의 절정은 서릿발 내리는 때이고 단풍의 절정도 대략 이때 전후의 시간이다. 첫서리가 내리면 가을은 무조건 절정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오랜 세월 천지의 일 년 주기 운행을 통찰하여 변곡의 때를 정리한 것이 24절기인데, 그중 가을에 해당하는 절기의 마지막에 바로 ‘상강(霜降)’이 있다. 인간은 긴 시간 동안 서리가 내리는 이즈음을 각별한 변곡점으로 기억해 둔 것이다. 인간만이 서릿발 내리는 시간을 기억해둔 것은 아니다. 나무도 풀도 그때를 각별히 기억하고 있다. 단풍으로 물드는 모든 존재는 서리 내리는 절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초목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성장의 욕망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풍을 성장의 욕망을 거둔 초목이 그려내고 있는 그림으로 읽는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서리 내리는 즈음 숲에는 꽃이 귀하다. 추상(秋霜)은 서리 맞은 온 자리를 얼어붙게 할 만큼 문자 그대로 ‘위엄이 있고 서슬이 퍼렇다.’ 대다수의 초목은 추상을 견디며 생장을 추구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 미세한 물방울이 허옇게 얼며 이파리에 내려앉으면 동해(凍害)를 입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지의 열기가 사라지기 전에 엽록소로 채웠던 초록의 욕망을 거두고 추상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풍은 생장 욕망을 거둔 자리에 남은 그 생명의 민무늬인 셈이다. 움직일 수 없는 생명이 우주 리듬에 순응하며 빚어내는 저마다의 빛깔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서로 어우러지며 연출하는 숲의 풍광이 알록달록 우리 눈에는 그토록 고운 것이다.

서리 내려도 고운빛 잃지 않는 고고한 꽃
첫서리가 내릴 즈음의 가을 숲, 대다수의 꽃이 사라진 공간, 다가올 겨울을 감지하면서 절로 쓸쓸해지는 내 몸뚱이는 한 해의 마지막 꽃들을 찾아 숲 언저리를 서성인다. 꽃향유나 배초향을 시작으로 구절초, 쑥부쟁이…. 무엇보다 아주 작고 앙증맞은 노란빛깔의 산국화, 우리가 ‘산국’이라 부르는 꽃이 피고 있는 자리 곁을 매년 어김없이 서성인다.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는 산국의 꽃 곁을 서성이는 어떤 날에 나는 더러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를 나지막이 읊조려 보기도 한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보다(후략)’ 그리고 생각해 본다. 미당은 내가 아는 국화의 비밀을 알았을까, 저토록 놀랍고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노골적인 일제 찬양 시와 살육의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자를 찬양하는 참담한 행위를 저질렀을까?
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 글의 목적도, 또 과문한 나의 몫도 아니므로 나는 다만 시인이 살핀,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설움이 얼마나 찬란한 아름다움인지만을 말하려 한다. 야생의 국화는 확실히 서릿발 내릴 즈음에 핀다. 그런데 왜 시인은 소쩍새와 천둥과 먹구름까지 끌고 들어왔을까? 미당이 알고 썼든 아니든, 생태적으로 국화의 개화는 봄에 찾아와 여름을 나고 남쪽 다른 나라의 땅으로 떠나는 철새인 소쩍새가 울기 이미 한참 전부터 준비되고 있다. 소쩍새 우는 계절에 산국의 뿌리 잎은 벌써 치열한 삶을 감당하는 중이다. 쑥쑥 자라고 있는 쑥이며 개망초며 심지어 칡덩굴이며…. 뒤섞여 여러 풀이 키를 앞다투는 풀 섶에서 안간힘을 쓰며 빛을 모은다. 천둥과 먹구름과 장맛비가 이어지는 여름날 그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감당은 커진다. 쑥과 개망초와 다른 풀들이 꽃을 피우고 기세 좋은 칡덩굴이 꿀 향기 강렬한 제 꽃을 피우는 한여름과 초가을 내내 산국은 침묵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오직 견디고 견디며 찬 이슬 맺히는 한로(寒露)마저 통과하고 마침내 서리가 내릴 즈음, 다퉈 피었던 모든 꽃이 지고 나면 그때야 산국은 개화를 시작한다.
드디어 상강의 절기, 서리가 내린다. 추상(秋霜) 아래서 모든 것들이 한방에 시들어 버리는 이 때, 산국은 비로소 만개한다. 그가 겪어낸 서러운 시간을 온전히 보상받는 때가 바로 이때다. 꽃이 귀한 계절, 겨울 입구의 모든 곤충에게 그 그윽한 향기를 풍겨 꿀과 꽃가루를 나눠주면서 제 씨앗을 영글게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무성한 풀 더미 속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제 꽃 드러내지 않고 양보하였던 산국은 그래서 누님 같은 꽃이 아닐까를 생각하곤 한다. 젊은 날엔 동생들에게 양보해 왔던 미덕 가득한 누님,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란 표현을 나는 그렇게 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