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열전
Writer 박선영
Photo 정준택
오늘도 태안 바닷가에 살어리랏다
자염 복원가 정낙추 태안문화원 원장
인간의 역사가 시작됐을 때부터 소금은 중요한 존재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이스라엘인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소금을 비료로 사용했다. 아랍인들은 함께 소금을 먹은 사람을 친구로 여기는 풍속이 있다. 이들은 소금을 더불어 먹음으로써 약속이나 계약의 신성을 보증했다. 중세 유럽에서도 귀한 손님이 오면 소금으로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 앞에 소금 그릇을 놓았다. 인간에게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생존을 위한 하얀 보물, 바다에서 피어난 소금꽃 ‘자염(煮鹽)’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을 빗대어 ‘빛과 소금’이라고 비유한다. 이처럼 소금은 꼭 필요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오래 버틸 수 있지만, 소금과 물 없이는 며칠을 견디기 힘들다. 소금의 주요성분인 염소와 나트륨이 인간의 생존과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짜다고 모두 같은 소금은 아니다. 햇볕과 바람이 만든 천일염(天日鹽), 산속에서 캐내는 암염(巖鹽), 연못의 물로 만든 지염(池鹽) 등등. 그중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방식으로 제조되는 ‘자염(煮鹽)’은 태안군의 명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염(煮鹽)은 끓일 자(煮)와 소금 염(鹽)이라는 글자에서 보듯이 염도를 높인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소금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태안 지방에서 생산되다가 명맥이 끊어졌을까?
2010년 개봉돼 김치의 다양한 맛을 선보인 영화 ‘식객:김치전쟁’에서는 태안의 전통소금인 자염이 등장했다. 극 중 세계적 요리사 ‘배장은’ 역할의 김정은은 최고의 소금을 얻기 위해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만든다. 갯벌에서 괭이질부터 삽질, 가마솥 끓이기까지의 험난한 절차를 거쳐 만든 자염으로 김치를 만드는 모습은 영화에서 손꼽히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고된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자염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직접 만들어 먹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보급된 천일염에 밀려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대중적인 생활문화가 잊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현 태안문화원 원장 정낙추 씨와 <농부와 소금가마> 영농조합원들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자염의 부활
만화가의 삶을 살던 정낙추 원장은 고향이었던 태안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시작했다. 고된 농사일을 마치면 자연을 벗 삼아 시, 소설을 쓰는 것이 그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문학인으로 살던 그가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정 원장과 자염의 인연은 주변 지인들과 태안의 향토 문화를 이야기하다 자염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정 원장은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자염 복원에 의지를 투합하여 2002년 자염 생산과정을 재현했다. 50년 만에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 낭금갯벌에서 자염의 생산과정이 전통 방식대로 재현되었고 역사학계와 문화계, 언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자염에 관한 문헌을 찾고, 자염을 직접 만드셨던 어르신들을 만나 복원과정을 배우는 것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정 원장을 포함한 향토문화연구모임 회원 4명은 전국 각지의 박물관,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자염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염을 만든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았고, 어르신들에게서 50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안의 고유한 생활문화를 부활시켜 보자는 의지는 이들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각종 자료와 실제 사례에서 찾은 자염은 복잡한 공정과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땀의 결실이었다. 정 원장은 말한다. “화려한 유형의 보물, 독창적인 기술, 유서 깊은 민속놀이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우리나라 역사 속 서민들의 생활문화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염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상들의 삶의 모습과 애환이 담긴 역사를 다시 그리는 일이 숙명인 듯, 인터뷰 내내 정 원장의 표정에는 자긍심이 묻어났다. 정 원장이 자염을 판매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본디 상업적으로 판매할 목적은 아니었으나 자염의 생산과정을 복원한 것만으로도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혹여 전통 방식의 자염이 아니라 이윤 추구를 위해 불량 자염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들려 왔다. 정 원장은 깊은 고민 끝에 자염을 태안의 명물로 브랜드화하였고 영농조합원들과 의기투합하여 판매를 시작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이탈리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비영리기구 국제슬로푸드 협회는 자염을 ‘맛의 방주’ 한국 3호로 등재 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음식의 종(種)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슬로건에 부합한 음식으로 자염이 선정된 것이다. 자염은 바닷물을 간장 달이듯 뭉근히 끓이는 동안 불순물을 걷어내기 때문에 쓴맛과 떫은맛이 없다. 또, 바다 생명체의 사체가 천연 갯벌에 남긴 유기물질 덕분에 미네랄, 철분, 마그네슘 등도 풍부하다. 천일염보다 칼슘은 1.5배, 유리 아미노산이 5배나 높지만 염분은 상대적으로 적어 김치를 담글 때 유산균 개체수를 증식시키는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원장은 자염의 진가가 발휘되는 음식은 ‘콩나물국’이라고 말한다. 오로지 콩나물과 물, 소금만으로 맛을 내야 하는 콩나물국의 화룡점정은 바로 소금일 터. 태안 자염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쓴맛 나지 않는 담백한 콩나물국을 만들어 준다. 이 외에도 탕 종류의 음식에서 특유의 감칠맛을 살리는 데 탁월하고, 고기 기름장이나 생선 구울 때도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현재는 식용 이외에도 자염 비누, 자염 치약이 생활 상품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자염은 한번 생산하는 데 8~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다 생산량 또한 적어 대량생산이 어려운 것이 최대 단점이다. 게다가 갯벌의 여건으로 완전 기계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전통 그대로의 방식이 아니면 생산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법인은 소량 명품화 전략으로 ‘태안 자염’의 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정 원장은 “현상 유지만 된다면 태안의 전통 생활문화를 살리는 차원에서 원형을 변질시키지 않고 태안의 역사 문화기업을 보존하고 싶다”라며 자염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열정, 그의 땀과 노력으로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천연 조미료를 앞으로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