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Love Campaign
가족, 이전의 모든 것들과 현재 겪은 모든 것
‘Let’s Love Campaign’은 여러 분야 작가들의 ‘사랑’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통해 우리 주변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김경옥 동화작가의 ‘옛 구둔역 외할머니’ 이야기를 통해 ‘가족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김경옥 작가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 거울 공주』, 『불량 아빠 만세』, 『밤 10시의 아이 허니J』, 『공양왕의 마지막 동무들』, 『은빛 웅어 날다』, 『말 꼬랑지 말꼬투리』 , 청소년 소설『 빈집에 핀 꽃』 등이 있다.
옛 구둔역과 외할머니
“지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께 용돈 전달식을 하겠습니다.”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월급을 탄 딸이 나의 친정 부모님께 처음으로 용돈을 드렸다. 친정 부모님은 손녀딸이 내미는 용돈에 감격하며 기뻐하셨다.
“아이고 세상에! 우리 지영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용돈을 다 주네. 아이고 기특해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흐뭇하면서도 한편 가슴이 아릿했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나의 외할머니께 나는 한 번도 용돈을 드리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절반은 외갓집에서의 추억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도회지에서 자랐지만 내게 풍부한 감수성과 정서를 안겨준 것은 시골 외갓집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고 방학이면 꼭 외갓집에 갔다. 기차를 타고 양평 구둔역으로 가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둔역에 내리면 그리운 외할머니 얼굴이 벌써 한가득 들어온다. 산길과 논두렁 밭두렁을 한참 걸어가면 비로소 우뚝 서있는 장승과 함께 모퉁이에 ‘지산부락’이라고 쓰인 표석이 나온다.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 집을 향해 마구 뛰었다. 벅찬 가슴으로 기와집 대문을 열고 흙마당에 들어서면 시골집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가슴으로 스민다.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 들어간 외갓집 마당은 늘 고요했고, 이 밭 저 밭으로 달려가 보면 할머니의 작은 몸뚱이는 뙤약볕 아래에서 쪼그리고 앉아 밭을 매고 있었다.
“왔냐!”
검게 그을렸지만 할머니의 양 볼은 유난히 발그레했고, 은비녀를 꽂은 쪽머리며, 깔깔깔 웃으시던 치아 없는 입이 내 눈엔 항상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욕쟁이 할머니인데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 나는 이런 할머니를 정말 좋아했다.
언젠가는 내가 할머니께 혼이 난 뒤, 괜히 심술을 부리느라 혼자 집에 가겠다며 짐가방을 싸들고 동구 밖까지 걸어 나가자 할머니가 뒤따라오며 무척 속상해하셨던 기억도 있다.
중학생이 된 뒤부터 외갓집에 가지 못했고, 그 뒤 결혼하여 우리 딸 임신 중일 때 외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할머니의 정겨운 얼굴과 가슴에서 풍기던 땀 냄새와 할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을 도무지 잊지 못한다. 한 번은 외할머니 꿈을 꾸고 난 뒤 너무 그리워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그 만큼 내 삶의 깊은 곳에 스며있는 나의 외할머니!
요즘은 아이가 귀하다 보니 아이들은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자란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이 하나를 여섯 명의 어른들이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결핍이 없는 요즘 아이들은 이 다음에 커서 그런 조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할까? 어느 가족 영화의 엔딩 자막이 생각난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어느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모든 일들과 우리가 현재 겪은 모든 일들을 합친 것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모든 것들과 우리가 영향을 끼친 모든 존재들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것이 좋던 나쁘던 간에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느덧 내 삶에 깊이 관여한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