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Writer 고정희 Photo 정준택, 태안군청

태안과 바다 그리고 역사

‘태안(泰安)’이란 지명은 고려 후기 충렬왕 24년에 원나라 환관에 의해 생겨난 이름으로, 그 전까지 ‘소태(蘇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중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후기, 고려는 많은 물자를 원나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소태현 출신인 이대순은 환관으로 원나라에 넘어갔고, 황실의 총애를 받아 세력을 얻게 되었다. 고려 충렬왕에게 자신의 고향인 소태현을 ‘태안’으로 개칭하고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요구면서 ‘태안’이란 지명이 탄생했다. 태안은 ‘태평하고 안락하다’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 중 하나로 꼽혔다. 이처럼 태안의 역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숨어있다.

무서운 바다로 악명 높았던 태안 앞바다
충남 서북부에 위치한 태안반도 일대는 섬과 해변의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태평하여 안락하다(泰安)’라는 지명의 의미와 달리 태안의 바다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수많은 배들을 침몰시킨 무시무시한 바다로 악명이 높았다. 신진도와 마도, 가의도와 파도리 사이의 안흥량은 특히 물길이 험해 옛사람들이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을 정도로 배가 난파되기 쉬운 곳이었다. 1123년 배를 타고 고려에 왔던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자신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마도 앞바다에 대해 “놀라운 여울물이 들끓어 오르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태안 앞바다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우리나라 바닷길의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많은 곡식을 개성으로 보내는 ‘조운(漕運)제도’가 있었다. 이때 이용한 배를 ‘조운선’이라 불렀는데,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은 보령 앞바다에서 태안의 안흥량을 거쳐 당진의 난지도 서쪽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안흥량은 조운선들의 최대 난관이자 골칫거리였고, 이곳을 지나가다 거센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침몰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조선 세조 때 태안 사람들은 조운이 안전하기 바라며 태안 지령산에 ‘파도를 잠재우는 절’이라는 뜻의 ‘안파사(安波寺)’를 짓고 기도했다.

육지에서 섬으로 바뀐 안면도
안면도는 원래 육지에 붙어있는 ‘안면곶’이었다. ‘곶’이란 육지에서 바다로 길게 뻗어 튀어나와 있는 땅을 의미한다. 안면도의 앞바다는 암초가 많고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여서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안과 서산 사이의 땅을 뚫어 운하를 만들려고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다 조선 인조 때 태안의 아전 방경잠(房景岑)이 안면곶이의 입구를 끊어 섬으로 만들어 그 사이로 배가 통과하도록 하자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 계획이 충청감영을 통해 정부에 전해졌고, 바로 실행되어 ‘백사수도(白砂水道)’라는 운하를 완성하였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조선 후기 <토정비결>이란 책을 쓴 토정 이지함이 안면곶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태안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이때 그는 “나중에 반드시 안면곶 뒷 줄기를 파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그의 예언대로 그가 죽은 후 50여년 만에 안면곶이 안면도로 바뀌었다.

묵묵하게 바다를 지키는 옹도의 등대
태안에는 수면 위에 비치는 섬의 모양이 마치 항아리를 닮았다 하여 항아리 옹(瓮)자를 써서 ‘옹도(瓮島)’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옹도는 신진도항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무인도이다. 이 작은 무인도에는 충남의 많은 섬 중에 유일하게 사람이 지키는 등대가 있다. 그리고 그 등대의 모습이 아름다워 태안 사람들은 옹도를 ‘등대섬’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옹도에 등대가 세워졌을까? 아쉽게도 우리의 필요가 아닌, 일본의 요구로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인 1906년,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뒤 우리나라 앞바다를 차지하기 위해 항로표지를 건설하면서 곳곳에 등대를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고 5년간 26개의 등대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아홉 번째로 옹도에 등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07년 1월 1일 옹도 등대에 처음 불이 켜진 뒤 2013년까지 약 106년간 옹도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옹도 등대는 40㎞ 떨어진 곳까지 불빛을 비쳐줘 평택과 인천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을 지켜준다.
옹도는 오랜 시간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아 섬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2013년 개방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봄이 되면 100년이 넘은 동백나무 군락이 장관을 이루며, 가을에는 선선한 바람과 아름다운 서해바다를 함께 감상하며 산책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옹도 등대는 지금도 변함없이 묵묵하게 바다를 지키며 누군가를 안전한 길로 안내하고 있다.

옛날부터 태안의 진산으로 불리는 백화산
옛날에는 관아가 있는 곳 중심지의 우뚝한 산을 ‘진산’ 또는 ‘주산’이라 부르며 신성하게 여겼다. 태안의 진산은 ‘백화산’이다. ‘흰색의 산’, ‘흰 꽃의 산’이란 뜻의 백화산은 높이가 284m로 아담하지만 산 위에 오르면 태안 일대와 남해포까지 눈에 들어온다.
옛날부터 태안 사람들은 백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어 과거에 급제한 태안 사람의 수가 적다고 믿었고, 산이 검은 빛을 띠는 ‘흑화산’으로 바뀐다면 문인이 만 명, 장군이 천 명이 나올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백화산에 나무를 많이 심어 흰 바위를 가렸고, 광복 후 숲이 무성해지면 태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올 거라는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백화산의 오래된 절 흥주사 만세루 앞에는 태안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가 있다. 한 스님이 절을 짓기 위해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다 백화산 중턱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 “지금 이 자리가 바로 부처님을 모실 곳”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스님은 그 자리에 지팡이를 꽂아 표시해뒀고, 훗날 이곳에 절을 지었다. 꽂아둔 지팡이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은행나무로 자라 흥주사를 지키는 사천왕이 되었다. 이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나무에 기도를 하면 아이가 생겼고, 나라에 위험이 닥치면 나무가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역사를 품은 태안의 소나무숲
안면도 소나무는 ‘안면송’이란 이름을 가질 정도로 유명하다. 쭉쭉 뻗은 안면송은 궁궐과 관아, 그리고 큰 배를 만들 때 쓰는 귀한 재료였다. 특히 조선 시대 내내 안면송은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의 경우 1700년대에 안면송 344그루가 사용되었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도 안면도에서 소나무를 가져다 사용했다.
조선 시대에는 안면도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면 아무리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거운 벌을 피할 수 없었다. 1550년 안면도에 병사들을 끌고 사냥을 왔던 병마절도사가 실수로 불을 내 소나무가 모조리 불타 버렸다. 이 소식으로 조정에 모인 왕과 관리들은 당사자인 병마절도사와 서산군수, 그리고 충청감사까지 모두 벌을 줘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인 개인이 섬을 사들여 안면송을 빼앗기 위해 잘 가꾸기도 했지만, 송진을 채취한다며 나무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광복 직후 주인 없는 섬이 되자 ‘도끼 하나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다’라며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많이 잘려나갔다.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을 복원할 때에도 안면송 425그루가 사용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2019년에 안면도 소나무숲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안면송은 우리가 영원히 보존해야 할 역사를 품은 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