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안에 머무르는 영화 Writer 정유미 자유기고가 자료사진 네이버 영화 <

명화, 스크린으로 다시 태어나다

그림에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캐릭터가 담기곤 해서, 120분간 몰입도 높은 드라마를 보여줘야 하는 영화에 매력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관객에게 이색 즐거움을 주거나, 복선을 던져놓거나, 혹은 중요한 메시지를 아우르는 등 아주 다양한 용도로 그림을 활용하고 때론 그림과 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네를 탄 라푼젤? 혹은 안나?
그네를 탄 젊은 여인이 하이힐까지 벗어던지며 앞으로 뒤로 왕복운동을 하는 동안 그녀를 바라보는 두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혹 순진한 그녀가 두 남자 사이에서 밀당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네’는 로코코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가 1767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태생으로 이탈리아에서 5년간 유학을 하기도 한 그는 주로 아이와 여인 등을 소재로 섬세하고도 관능적인 풍속화를 그렸는데, ‘그네’ 역시 아름다운 여인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과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더해져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비로운 얼음마법 이야기를 그려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속에 프라고나르의 ‘그네’가 패러디되어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절묘하게 등장한다. 엘사의 동생인 안나가 성 안에서 노래를 부르다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오르면서 어느 그림을 흉내 내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같은 그림이 월트디즈니의 또 다른 애니메이션인 <라푼젤>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터인 리사 킨(Lisa Keen)이 <라푼젤> 당시 완성한 것으로, 푸른 숲속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그네에 발랄한 숙녀가 앉아 하이힐까지 벗어던지며 노니는 모습이 영락없이 프라고나르의 ‘그네’다.

슬퍼하는 남자, 올드 보이
15년간 영문도 모른 채 사설감옥에 감금당한 남자 오대수의 방에 걸려 있던 기괴한 그림 한 점. 웃는지 우는지 모를 남성의 얼굴과 배경은 붉은빛을 띠고 있으며 어쩐지 오대수와 많이 닮아 있다.
후기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의 작품으로 제목은 ‘슬퍼하는 남자’다. 제임스 앙소르는 해골이나 가면 같은 소재를 이용해 삶과 죽음, 인간의 우매함 등을 묘사했는데, 이 작품은 그 스스로 위기가 닥쳤을 때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무서운 얼굴인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눈은 울고 입은 웃는 모양을 하고 있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의 오마주로, 인류를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던 예수를 눈물과 웃음이 함께 담긴 기괴한 얼굴로 표현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그림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오대수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영화 <올드보이> 속에서 이 그림이 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림 위에 새겨진 글귀 때문이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19세기 시인인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의 시「 고독」의 한 구절로, 영화의 후반부까지 반복되어 ‘눈은 울되 입은 웃음을 잃지 않는’ 오대수의 표정과 더불어 강한 여운을 남긴다.

황금빛 초상화, 우먼 인 골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은 그 유명한 작품 ‘유디트’처럼 캔버스에 유채와 금으로 채색해 매우 화려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이다.
이 그림의 모델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Bauer, 1881~1925)는 상류층의 부유한 유대인 여성이었다. 클림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어릴 적 사고로 오른손 손가락을 다쳤는데, 그림에서 그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아델레가 갖고 있었으나 그녀가 죽고 난 뒤 남편은 나치에 의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그림을 몰수당했고, 이 그림을 조카들에게 남긴다는 유언만을 남기고서 세상을 떠났다. 긴 세월이 지나 1998년, 그의 조카인 마리아 알트만은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그림들을 되찾기 위해 8년간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한다.
사이먼 커티스 감독의 <우먼 인 골드>는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빼앗긴 과거를 되찾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외롭고 긴 싸움을 벌이는 여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 그림이 오스트리아 최고 화가의 명화로 보이겠지만, 제 눈에는 제 숙모가 보입니다. 머리를 빗겨주며 인생을 가르쳐주던….’